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사이의 전쟁, 640년대 소모전 == >[[이세민|황제]]가 '''옷과 활을 [[연개소문|개소문]]에게 선물하였는데''', 사신을 보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조공을 깎고 받지 않도록 하였다. >---- >'''신당서 고려전''' >(646년 5월)보장과 개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미녀 2명을 바쳤으나''' 돌려보냈다. >(646년 6월)개소문이 비록 사신을 보내 국서를 주었으나 '''그 내용은 모두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당나라 사신을 '''거만하게 대했으며, 항상 국경의 빈 틈을 노렸다.''' >여러 차례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는 침공하고 능욕함을 멈추지 않았다. >---- >'''자치통감 당기''' 연개소문과 이세민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으나 비참함을 느낀 쪽은 언제나 이세민이었다. 연개소문은 당을 침공할 뜻을 내비치면서 고압적으로 대했고 계속해서 신라도 공격하였다. 당은 쉴 틈도 없이 다시 병사들을 징발하여 설연타의 20만 기병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이세민은 [[당고종|이치]]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정도로 심신이 무너져 있었으나 그의 고구려 정벌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었고 새로운 공략법을 입안하기에 이른다. >'''지금 만약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어 번갈아 그 강역을 어지럽혀, 저들이 명을 받아 출동하는데 피곤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로 들어가게 하면 수 년 사이에 천리가 매우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이반할 것이니, 압록강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만여 인을 동원하여 보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郞)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천 인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 병력을 따라 신성도에서 들어가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숙하여 잘 싸우는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그는 정면으로 고구려를 돌파하여 제압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우선 수만 단위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지속적인 소모전을 통해 고구려의 피로 누적을 노렸다. 647년 3월, 당나라의 첫번째 선발은 가장 노련한 장수인 이세적이었다. 우진달, 이해안 등 역시 후방의 요동반도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교전을 통해 성 주변을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고구려의 동원 체계를 피로하고 교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만여 인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서 공격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47년 12월, 막리지 고임무가 사신으로 건너가 화친을 성사시키고 648년 1월에도 연이어 친선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세민은 사죄를 받아들인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는 기만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대로 사신이 오는 동시에 3만의 군사를 뽑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지휘관도 물갈이되었다. 안정적으로 전술을 수행하는 노련한 선임 지휘관 이세적과 비교해서 후임 지휘관 설만철은 [[만인지적|혼자서 수천의 기병을 당해내고 대승을 거두는 용장]] 스타일이었다. 뒤이어 서해안의 수군장수인 고신감 역시 쳐들어왔다. 이 싸움에서도 설만철은 기이한 무용을 뽐냈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전과는 그렇게 시원치 않은듯 보인다. 당시 당나라 3대 명장으로 꼽히던 부마 설만철은 부장 배행방과 전공을 다투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처형만 간신히 면하고 명부에서 이름과 기록이 불살라진 채 유배를 당하면서 무장 경력이 끝난 것이다.[* 신당서에 따르면 설만철은 군사들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에 상륙하여 박작성을 공격하였고 이에 반격하려는 박작성주 소부손의 목을 베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사료 교차검증을 해보면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삼국사기에는 박작성 공략전에서 [[당나라군|당군]]이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군 성주의 목을 베고 3만의 [[고구려#s-7|고구려군]]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고 본국에 귀환한 장수가 부장과 갈등이 있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고 무장 경력이 끝날리가 없기 때문이다.] >태종이 송주(宋州)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강위 등이 백성을 뽑아 이민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었는데 아, 공, 미 3주의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임신일에 무주도독 장사귀, 우위장군 양건방 등으로 하여금 농우, 협중의 병사 2만여명으로 그들을 쳤다. >---- >'''자치통감''' 1~3만 규모의 비교적 소규모의 부대를 동원한 교전을 통해 감을 잡은 이세민은 선박 건조에 박차를 가했다. 647년 8월에 강남에서 선박 수백척을 건조한데 이어 648년 7월에는 지금의 사천 일대인 검남, 8월에는 무주, 월주, 홍주 등지에서 전함 1300척을 건조한다.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면서까지 강행할 정도로 선박 건조는 혹독하였다고 한다. 12월에는 신라에서 찾아온 김춘추를 성대히 환영하고 나당동맹을 성사시켰으며 계속해서 용사들을 모집하고 수군 기지에도 군량과 자재들을 쌓아 만전을 기했다. 30만 대군을 일으켜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로 한 예정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 4월에 당태종이 죽었다. 요동전쟁을 그만두라고 유언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이세민]]이 사망하였다. [[양제(수)|고구려에 대한 몽니와 집착이 광기에 근접해가던]] 그는 끝에 가서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구려와의 대결을 접으라는 명을 내렸다. 당태종에게 무익한 전쟁을 그만두라며 열심히 상소하던 당나라의 고위관료들은 평안을 찾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당태종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와의 재대결을 다시 노리며 계속해서 고구려와 분쟁을 지속했다. >고종이 토번 찬포를 부마도위로 삼고 서해군왕으로 봉했다. 장손무기에게 도달한 국서에서 말하였다.‘천자께서 새로이 즉위하셨으니 불충한 신하가 있다면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러 가겠소!’ >---- >자치통감 당기 토번에서는 이세민의 장례식에 사절을 보내 [[팝콘각|그 뜻을 전했다.]] 얼핏 봐도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이 발언은 연개소문을 겨냥한 이세민의 선전포고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내용임을 생각하며 본다면 그 조롱의 수위가 사뭇 달라진다. 오늘날에 대입하자면 장례식장에 간 조문객이 유가족 앞에서 성대모사로 [[고인드립]]을 친 셈이다. [[내로남불|터무니 없는 핑계로 전쟁을 강행한]] 이세민은 [[그거해봐 그거|그야말로 주변국의 비웃음거리가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